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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게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by 티롤의삶 2021.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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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민주화운동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깃발 없는 진압군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탱크들의 행진 소릴 들었소

아,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오...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옥상 위의 저격수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난사하는 기관총 소릴 들었소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여기 망월동 언덕배기에 노여움으로 말하네

잊지마라, 잊지마라, 꽃잎 같은 주검과 훈장

누이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오...

 

- 정태춘. '5.18' -

 

 

 

어김없이 5월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광역시 과 전라남도 지역의 시민들이 벌인 민주화 운동입니다.

이들은 계엄령 철회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 신군부들의 퇴진 그리고 김대중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군부들의 정권으로 어지럽혀진 헌정질서와 그들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1979년 10월 16일, 10월 26일 - 부. 마 민주항쟁, 박정희 대통령 피살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권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부산과 마산지역의 사람들 그리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대통령 피살 등으로 유신체제는 막을 내린다. 이 일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을 내렸다.

 

1979년 12월 - 신군부의 등장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최규하 권한대행과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본부장으로 임명했는데 이후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된 전두환은 육사 11기생을 중심으로 조직한 '하나회'를 기반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권력을 가지게 된다. 이를 '신군부'라 한다.

 

1980년 5월 15일 - 서울역 회군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자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하지만 신군부의 등장을 보며 다시 대학생을 중심으로 '계엄령 해제', '유신잔당 퇴진', '정부 개헌 중단', '노동 3권 보장'등을 외쳤고 1980년 5월 15일 전국 27개 대학 대표와 10만여 명의 대학생, 시민들이 서울역 광장에 모여 신군부를 향해 가두시위를 벌였다.

 

1980년 5월 17일 -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

시국수습을 목적으로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를 한다. 이때 전국 55개 대학 대표 98명을 연행 정당 및 정치활동을 금지, 대학교는 교내외 집회 시위 금지, 언론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검열 등 '포고령 11호'발령하고 국회, 정부기관, 대학, 언론사와 방송사에 계엄령을 주둔시켰다.

 

1980년 5월 18일 - 전남대 시위와 무차별 진압

비상계엄 다음날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학생들의 등교를 막았고 이에 학생들이 항의하자 계엄군의 잔혹한 폭력이 가해졌고 이에 만류하는 시민들에게까지 폭언과 구타를 가하게 됩니다. 이를 본 대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시위를 이어 갔고 이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시작이 됩니다. 

 

1980년 5월 19~02일 - 광주시민의 고립과 계엄군의 집단 발포

시민들은 더욱 분노하게 되고 금남로에는 버스, 화물차, 택시 등 2,000여 대의 차량시위를 벌이게 됩니다. 하지만 계엄군 또한 최루탄, 가스로 저지, 장갑차와 헬기로 대응하지만 방송국은 이를 제대로 방송하지 않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방송국 건물에 화재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계엄군이 시위 내용이 밖으로 나가는 걸 막기 위한 것으로 이후 전화까지 차단하게 됩니다.

 

1980년 5월 21일 이후 - 시민군의 등장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시민군'을 조직하고 도청에 자리를 잡습니다.

 

1980년 5월 26일 - 최후의 항쟁

5월 26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결국 계엄령 특공대가 투입되어 최후의 항쟁이 도청에서 벌어집니다. 1시간 남짓 이어진 항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이 되었는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1987년 6월 - 6월 민주항쟁과 6월 29일 민주화 선언

5.18 민주화운동 이후 사람들은 이러한 만행들을 알리고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한 노력으로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시민을 더욱 화나게 했던 일은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과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 이한열 군의 사망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주축을 이루어 시위가 일어났지만 점차 일반 시민들이 동참을 하게 되었고 이른바 '넥타이 부대'가 탄생하게 됩니다.

결국 이들의 목소리는 전두환으로 하여금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이게 했고 대통령 직접 선거오 국민의 기본권 보장, 구속하거나 연금된 정치 인사들의 석방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화는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이름 모르는 자의 피가 있었기에 지금의 민주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지만 항상 그들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과 동시에 이를 더럽히고 왜곡하려는 자들을 경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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