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 생각보다 쉬웠다" 외교관 편지 발견.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는 가슴 아픈 역사가 너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 오늘 이야기 나눌 역사의 일부 내용은 '을미사변'에 대한 내용입니다.
'을미사변'이라 함은 잘 모르시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좀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라면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국모였던 명성황후가 일본군의 칼에 숨을 거두는 사건을 말합니다.
도저희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2021년 11월 16일 일본의 아사히신문을 통해서 이를 확인하고 뒷받침할 수 있는 편지 8통이 발견이 되었다고 합니다.
과연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을까요?
■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 10월 8일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 곤녕합'에서 명성황후 민 씨가 조선 주재 일본 '미우라 고로'의 주도 아래 군. 외교관. 민간인 등의 습격으로 시해를 한 사건을 말합니다.
당시, 러시아는 조선의 지배력을 강화하려고 했고, 조선은 친일 내각으로 득세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내각에 들어온 일본세력을 몰아내려고 했고 이를 알아버린 일본 정부는 암살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 조선 측 세력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일본과 협력을 하는데 그중에는 흥선대원군이 있었습니다.
시해는 일본과 협력한 일부의 조선인들 때문에 빨리 시간에 이루어졌고 명성황후의 시신은 석유를 뿌려 소각한 뒤 연못에 던져졌습니다.
■ 을미사변 배후
오랜 시간 일본은 자신들이 저지른 사건이 아니고 오히려 조선의 내분에 일본인들이 속아서 참여하게 된 사건이라고 발뺌을 했지만 결국 여러 가지 증거는 일본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외무성 보고서 (2005년)
1895년 12월 21일, 당시 경성 주재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일본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에는 두 달 전인 10월1 5일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됐고, 시해 장소도 기존에 알려졌던 침전이 아니라 마당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고종의 침전에서 1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건청궁 마당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궁 옆 녹산에서 시신을 불태웠다고 합니다.
이 보고서는 일왕이 보고, 결재까지 했다고 합니다.
日외교관 편지 (2021년)
을미사변의 가담자로 보이는 한 외교관이, 명성황후 시해 다음 날 친구에게 쓴 것으로 보이는 편지 8통이 발견되었다고 아사히 신문이 보도를 했습니다.
을미사변 당시 조선에 영사 관보로 머물던 '호리구치 구마이치'가 고향인 니가타현 나카도리무라에 있는 친구이자 한학자인 '타케이시 사다마츠'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내용으로는 1894년 11월 17일부터 을미사변 이후인 1895년 10월 17일까지 사건 현장에서 자신이 했던 행동을 기록했으며 "진입은 내가 담당하는 임무였다", "담을 넘어 간신히 오쿠고텐 침소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쉬워서 오히려 매우 놀랐다"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 을미사변 이후
을미사변에 가담한 일본인들은 일본의 재판에 세워지긴 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처벌은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주도자였던 미우라는 석방 이후 메이지 천황이 직접 시종을 보내 치하하기까지 했다고 하며, 호리구치 역시 1년 정직 처분을 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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